올해 크리스마스 트리는 유독 아름다웠다. 고모가 새벽시장에 나가 제일 예쁜 트리를 골라 잡아왔기 때문이다. 파란은 같이 가고 싶어서 일부러 전날 밤까지 꼬박 샐 계획을 세웠지만, 11시만 되면 눈이 까무룩 감기는 바람에 올해도 실패하고야 말았다. 벌써 몇 번째 실패인지 모른다. 인생 9년차, 파란은 10살이 되는 크리스마스엔 인생 10년차의 명예를 걸고 꼭...
그 해 10월, 리칸이라는 영지에서 작은 소요가 있었다. 리칸의 영주인 마헬이라는 자가 사소한 문제로 거리의 아이를 죽였는데, 이에 반발한 영지민들이 영주에게 사과를 요구한 사건이었다. 소요는 반나절 정도 일어나다가 간단히 진압되었다는 소식이 며칠 동안 물과 땅을 건너 수도에 닿았을 때, 왕실에서는 아무도 이 사건에 신경 쓰지 않았다. 사건이라고 이름붙일 ...
세상이 불타고 있었다. “세상이 왜 불타고 있는데?” “나야 모르지.” “그걸 모르면 이야기 진도가 어떻게 나가냐.” “그러니까 같이 고민해보자고 앉은 거 아냐.” “진짜 짜증난다, 너.” 영은의 머리통을 쥐어박을까 말까 고민하던 재희는 한 번만 더 참아보기로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11년 차 친구의 머리통을 함부로 쥐어박지 않는 인간적인 예의는 있었...
뒤엉킨 실타래를 풀듯이 기억을 풀어헤친다. 손에 잡힌 기억은 눈앞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는 누군가. 다정하고 가느다란 손이 손가락 끝에 털실을 감아쥐며 나를 보고 있다. 나는 털실에는 관심도 없이 뭉툭한 뜨개바늘로 쿡쿡 손바닥을 찔러보다가 그를 향해 웃는다. 그가 웃음 섞인 한숨을 터트린다. 아니, 한숨 섞인 웃음이었던가. “좀만 더 집중해 봐. 이거 수행...
어렸을 때,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다 그렇듯 나는 버스 하차 버튼과 엘리베이터 버튼에 많은 흥미가 있었다. 대부분의 부모가 그러하듯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식의 위생에 민감한 편이어서 그런 것들을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버튼을 향한 집착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어느 날, 우리 집이 있는 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은색 문이 열렸다. 어머...
이지는 왼쪽 벽을 봤다가, 오른쪽 벽을 봤다. 대표이사 회장의 취향에 맞게 빈센트 반 고흐의 꽃 피는 아몬드 나무 그림에서 색감을 따와 오늘같이 비 오는 날에는 어쩐지 더 처지는 기분이 들었다. 세로로 굵은 선을 내 포인트를 준 벽의 무늬도 오늘따라 별로 마음에 안 든다. 이지는 책상 왼편에 올려져 있는 샛노란 색 서류철을 쳐다보았다. 이지는 그 제품의 이...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탕, 하는 노크 소리에 심장이 철렁했다. 자연스레 눈이 시계로 향했다. 자정이 되기 한 시간 전. 물론 시침과 분침이 달려 있고 하루를 12시간의 두 바퀴로 재는 일반적인 지구 시계는 아니었다. 벽 한쪽을 꽉 채운 시계 위로는 먼 구시대의 톱니바퀴들처럼 둥글고 납작한 시판들과 투명하게 빛나는 선들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별들이 ...
정윤에게 봄이란, 가장 추운 계절이었다. 늘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군림이라는 이름을 들은 후부터는, 늘 그랬다. 군림의 깃발이 올라가기 전에 이미 집을 잃었다. 거실과 부엌을 나눌 수 없는 좁은 공간에 방 두 개가 붙어 있는 작은 집이었지만 혜진과 함께 살던 공간이었다, 천장이 낮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빌라였지만 조용하고 관리가 잘 된 단지였다. ...
시현에게 봄이란, 가장 추운 계절이었다. 그 말이 행여 이곳의 사람들에게 의심을 살까봐 시현은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 없었다. 해가 차츰 길어지면서 사람들이 두터운 겉옷을 벗고 알록달록한 털갈이를 해댈 때에도 시현은 꿋꿋이 겨울의 옷차림을 고집했다. 근처에 사람이 없을 때면 얼른 목 끝까지 도톰히 패딩 지퍼를 채우고 성근 털실로 짠 목도리를 그 위에 둘렀...
“은하는 오늘 엄마가 오시기로 했니?” 선생님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언제나처럼 상냥한 얼굴이었지만 웬일인지 입술이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몇 번이나 눈동자를 굴리다가, 잘 모르겠어요, 하고 대답했다. 선생님의 상냥한 얼굴에 살짝 금이 갔다. 선생님은 조금 당황스러운 얼굴로, 하지만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엄마가 별말 없으셨어?...
내가 너 좋아한다며? 뭔 소리야.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보는데. 너도 그러냐? 나도 그래. 오린(烏燐)은 허리를 일으켜 세우려다가 어처구니가 없어 다시 몸을 내려놓았다. 부지불식간에 실소마저 터졌다. 전쟁이 일이년 하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보니 새끼들이 슬슬 해도 되는 말, 안 되는 말 가리지 않고 지어내서 지들끼리 낄낄거리는 모양이었다. 들어가서 누가 그...
후회할 거야. 돌아선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입술 끝에 달라붙은 웃음소리가 팝핑 캔디처럼 탁탁 튀어 올랐다. 분위기를 아주 가볍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촛불이 일렁이며 그의 얼굴 위로 이리저리 음영이 흩어졌다. 그게 어쩐지 즐거워 보여서 나도 마주 웃었다. 두근거리는 순간이었다. 후회할 일 없어요.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는데. 아직은 그렇겠지. 꼭 후...
케이&시엘라의 연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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