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선홍은 그 날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임관 글이 창피해서도, 날이 더워서도 아니었다. 그냥 화진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전부, 끊기기 직전까지 당겨진 활시위 같았다. 오히려 미술관에서 봤던 작품을 묘사하라면 더 잘 할 자신이 있었다. 화진은 이른 점심을 먹었지만 배는 고프지 않다고 했다. 방학 때마다 가족과, 때로는 혼자 서울에...
“화 안 나냐.” 벤치 앞에 선 희주가 뱉은 첫마디였다. 진은 나뭇가지로 모래바닥을 갉작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앞에 선 희주가 진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짧고 진한 그림자가 진의 발등을 덮었다. 진은 그림자 밖으로 살짝 발을 뺐다. 말없이 고개를 다시 숙이고는 모래바닥을 긁어 ‘화’라고 썼다. 희주가 발을 뻗어 글자를 지워버렸다. 슬리퍼 밑창 아...
선홍은 자신의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좋아하라는 게 무리 아닌가. 자신의 삶이 이렇게 꼬여버린 건 부모님이 지어준 이 이름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있는 정도가 아니다. 자주 했다. 이름이 선홍이라, 내가 레즈비언인 건 아닐까? 하고. 그럴 리가 없고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지만 가끔은 비난할 것이 필요하고, 그게 나에게 반박할 수 없...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을 때 선홍이 느낀 것은 해방감이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도, 부모님의 무의식적인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도 아니었다. 보다 드넓은 익명의 바다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감각 때문이었다. 인구 천만의 도시 서울, 시청 앞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리고 몇 만이 그 행사에 참가하는 도시 서울, 지하철이 9호선까지 있는 도시 서울, 옆집 사람...
“야, 그거 알아?” “뭘 알아?” “오늘이 무슨 날인지?” 호오, 입술을 동그랗게 말아 부는 네 입에서 얕은 입김이 흩어졌다. 입김이 서릴 정도로 추운 공기는 아니었지만, 입 안과 바깥의 온도차가 큰 모양이지. 너는 방금 대가리를 베어 문 붕어빵 하나를 오른손에, 따끈따끈한 흰 봉지를 왼손에 들고 곁눈질로 나를 보았다. 왼손을 제 가슴에 밀착시켜 꼬옥 안...
“종신서원을 한다고?” 와하하! 텔레비전 안에서 웃음이 터졌다. 푹 가라앉은 공기에 걸맞지 않게 경박스러운 웃음소리였다. 나는 발끝을 뻗어 리모컨에 엄지발가락을 올리고, 곁눈질로 바라보던 화면을 뚝 꺼버렸다. 거실에는 고요하게 뿜어지는 에어컨 바람 소리만 남았다.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현희의 목소리가 좀 더 선명해졌다. 무언가를 씹는지 우물거리는 발음으로 ...
비가 내린다. 벽에 기대어 앉아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딱딱한 벽과 불편한 의자. 카페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지 않는데, 어쩐지 그랬다. 카페는 출입문과 문이 있는 벽이 통으로 유리여서 흐린 하늘과 명도가 두 단계 정도 낮아진 풍경이 시야를 따라 가지런히 서 있었다. 마치 마음 속 정경 같았다. 비가 오는데도 정작 비가 보이지 않는...
비가 오면 놀러와줄래요 그 말이 다시 떠올라 나는 아마 널 잊지 못 한 거겠죠 네 얼굴은 여전히 또렷하고 나를 보며 웃던 그 미소까지 생각나고 비가 와도 지워지지 않고 생각나 생각나 나는 아마 널 잊지 못 한 거겠죠 비가 오는 날에 비에 관한 노래를 튼다는 것은 꽤 상투적인 일이지만, 우주는 간만에 맞이하는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하기로 했다. 여름휴가는 사흘...
비가 오면 놀러와줄래요? 그것은 얼핏 고백처럼 들렸다. 고백처럼, 이라는 말은 실제로는 그게 고백이 아님을 전제로 한다. 혹은 고백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청자의 욕심을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과연 무엇에 대한 고백이 될 수 있단 말일까. 자신은 어떤 고백을 듣기를 바라는 걸까. 잠깐의 침묵 끝에, 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다시는 안 올 거야...
너는 씨발, 평생 그렇게 살아. 귀를 의심했다. 엄마가 욕하는 걸 태어나서 처음 들었다. 내가 알던 엄마는 욕이라곤 제기랄도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순간 너무 놀라서 말이 안 나왔다. 마주친 지연의 눈이 땡그래진 걸 보니 지연도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침묵. 아빠는 뺨도 맞지 않았는데 벌써 석 대는 맞은 사람처럼 ...
“너는 씨발, 평생 그렇게 살아.” 네 낮은 목소리가 헤라의 저주처럼 울렸다. 분노에 차 내뱉어버린, 의미 없는 말이긴 했지만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덩그러니 카페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맞은편의 빈자리를 내려다보며 시간을 버린다. 이러고 싶었던 건 아닌데. 정확히 말하자면 어떻게도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긴장 넘치는 관계들이 아슬아슬하게 유...
너는 내게 나를 아냐고 물었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그 질문을 못 들은 척 시선을 멀리 던졌다가, 네가 선생님? 하고 불렀을 때에야 비로소 고개를 다시 돌렸다. “미안해요. 요즘 귀가 어두워서. 뭐라고 했지요?” “아, 혹시 작가님을 기억하시느냐고……, 선생님께서 유일한 가족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작가님의 하나뿐인 따님이시라고요. 혹시 그분에 ...
케이&시엘라의 연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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