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게 나를 아냐고 물었다. 나는 너를 모른다고 했다. 그렇구나. 네가 웃었다. 안심이 된다는 투였다. 너는 그래도 아는 척 하는 사람은 아니네. 짐짓 흘러나온 말이 진심인지 비꼬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기분이 나빠졌다. 대꾸하지 않고 잠자코 있자, 네가 미안하다는 듯 무릎을 꿇고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너무 화내지 마, 네가 그런 사람이어서 좋아하는...
사소한 계기 하나로도 충분했으니까. 호랑은 물끄러미 제 손톱들을 바라보았다. 제 손으로 뭉뚝뭉뚝 깎아 끝이 얼룩덜룩한 손톱들. 마치 제 마음같이 다루어지는 손톱들. 감성적인 척 하기에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한 해 한 해 살결이 드러날수록 감정을 외면하기가 더욱 힘이 든다. 나는 그냥 네가 보고 싶은 것뿐인데. 네가 어떤 마음인지는 충분히 알고 ...
사소한 계기 하나로도 충분했으니까, 하고 노인의 말끝이 흐릿하게 늘어졌다. 급하게 품을 뒤져 담배를 찾는 손을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에는 담배가 아니라 약이라도 쥐어줘야 할 것 같았으니까. 구체적인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이미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사소한 계기 하나로도 충분했다는 건 결국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다는 뜻이다. 발화지...
과거 때문에 현재를 포기한다는 것만큼 멍청한 것이 없다고, 윤은 거듭 생각했다. 용비가 적룡궁에 존재했다는 것은 명백히 과거였다. 윤이 린을 사랑한다는 것은 명백한 현재였다. 올지 안 올 지도 모를 과거의 존재 때문에 현재를 포기할 수 없었다. 으르릉!!! 용궁을 에워싼 바닷물이 용울음을 울었다. 용궁의 미래는 윤의 의지와 무관했다. 윤이 린을 사랑하건 말...
과거 때문에 현재를 포기한다는 것. 멍청한 문장이다. 적어도 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왜 지나간 것 때문에 지금을 썩혀.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여야지. 지금부터 행동하면 미래가 바뀌게 되는 것 아니겠어? 주저앉아 있으면 뭐가 달라져? 난 안 그럴 거야. 당당한 호언장담에 랑이 사르르 웃던 것을, 영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랑은...
거짓말이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무엇이 거짓이었느냐고 물으면, 방금 내가 했던 모든 말이 거짓이라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거짓이냐고 물으면, 글쎄. 그냥 전부 다. 이틀 전 할 말이 있어요, 하고 당신을 불러 세워 기껏 약속 시간을 잡고, 자리에 앉아서도 한참을 망설이고, 결국 오랜 시간 속여 왔던 마음들을 줄줄 쏟아낸 주제에, 숨도 쉬지 않고 다시 말한다...
거짓말이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수현에게 차였던 다음 날, 도영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그렇게 순간을 얼버무렸다. 술내기 같은 거였다고. 순식간에 들킬 거짓말이었다. 도영은 술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동기들이 더 이상 같이 술 먹자고 권하지도 않는다. 낯이 뜨거워서 피부가 타버릴 것 같았다. 수현이 무어라 말하려고 계속해서 입술을 달싹 거렸지만 도영은 그럴 때마...
울어도 위로해줄 사람은 없다. 우주가 그것을 깨달은 것은 제법 오래 전의 일이었다. 밥상 끄트머리에서 오빠가 남긴 생선 쪼가리를 먹어야 했을 때? 엄마가 오빠 밥 챙겨주라며 라면 끓이는 법을 알려주었을 때? 아빠가 기집애가 무슨 서울까지 가서 대학에 다니냐며 뒤에 말도 듣지 않고 등 돌려 버렸을 때? 어쩌면, 어쩌면 우주가 세상을 인식하기도 전에 깨달아버린...
울어도 위로해줄 사람은 없다. 더 이상은 그 어디에도. 그 당연한 사실을 직면했을 때 정시우는 열두 살이었다. 이미 자신의 정신연령은 스물두 살쯤 먹은 거나 다름없다고 여기던, 그리고 스물두 살이 된 사람들은 모두 엄청나게 어른인 거라고 여기던, 그래서 자신도 이미 어른이 된 셈이라고 여기던, 열두 살. 열두 살의 정시우는 혼자 남은 교실을 한 바퀴 둘러보...
모두 의미 없는 일인데. 옆 테이블에서 서로를 녹여버릴 듯이 뜨거운 시선을 교환하는 커플은 자신보다 못 해도 열 살은 어려 보였다. 그래, 어리면 그럴 수 있지. 나도 어릴 땐 그랬으니까. 뭘 그랬냐고 물어보면 딱 집어서 말하긴 어렵지만, 아무튼 어릴 땐 그랬다. 다 할 수 있고, 다 괜찮고, 상대방이 다 날 사랑하고, 다 이해해 줄 거고, 다 잘 될 거고...
언제든지 네 곁에는 내가 있어. 노래 가사 같은 뻔한 거짓말을, 믿기를 바라서 한 말도 아니었을 테고, 그 말을 믿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당연하다는 듯이 너는 사라졌고 홀로 남은 순간을 자각하고야 말았을 때, 그 말이 떠오른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이치 같은 것이었다. 지킬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지극히 소중한 사람이 가장 중요한 약속을 ...
우리는 이제, 결코, 서로 들어맞을 수 없게 되었어. 린은 자신의 말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을 무마시키려는 듯 발장구를 쳤다. 발끝을 따라 동그란 원이 크고 작게 만들어졌다가 가라앉았다. 수면의 출렁임을 가만히 바라보던 린은 심술궂은 콧바람을 내쉬더니 한쪽 발로 수면을 굴렀다.물줄기가 솟구쳐 올라 격자무늬를 만들었다. 상대방과 자신의 사이에 벽을 세운 린은 ...
케이&시엘라의 연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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